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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 짜파게티 성공의 역사

정보|2020. 8. 2. 15:41

 

 

농심은 짜파게티로 짜장 라면계의 왕좌에 올랐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짜파게티의 역사를 논하기 앞서 먼저 짜파게티를 탄생시킨 농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면 다들 알겠지만 농심은 롯데에서 분리되었죠.


농심 창업주 신춘호 회장은 롯데 신격호 회장의 10살 어린 동생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유는 바로 라면산업 진출문제 때문이죠.

1960년대 당시 박정희 정부는 고질적인 쌀 생산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혼분식장려 정책과 운동을 펼칩니다. 요즘엔 거의 비만의 주범이나 건강의 적으로 악마화된(?) 밀가루가 당시엔 맛이나 영양이 우수하다며 권장시되었죠.


이때부터 한국인들의 밀가루 소비량이 늘면서 식생활이 크게 바뀌게 되었죠.

이런 시대적 흐름에 급성장한게 바로 라면산업인데 선두주자는 삼양이였습니다.
삼양 창업주 전중윤 회장은 과거 일본 출장중 먹었던 라면맛을 떠올리고 맛도 좋고 한국에서도 먹히겠다 싶어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 중정부장을 찾게됩니다.

 
라면의 우수성을 역설하던 전중윤 회장은 망설이는 김종필 부장에게 라면을 시식케하는데 좀전까지 망설이던 김종필 부장이 먹고나서 OK  합니다.


정부로부터 5만달러 (후에 5만 달러 추가)를 융통해 라면기계를 사오고 라면공장을 지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입니다.
초반엔 엄청나게 격노하셨죠.


지금 나라에 돈이 없는데 저깟 튀김국수 도입한다고 몇만 달러를 가져다 쓰는거냐고 말이죠.
그래서 김종필 부장이 식량난 해결과 미래 성장산업으로 괜찮다며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막상 드시고나서 입장이 달라진 뒤, 그 후로 삼양라면을 팍팍 밀어줬습니다.

특히나 식량난 해결과 산업발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삼양공장을 방문하는데 초반엔 국민들이 라면에 거부감을 거부감을 느끼는 통에 라면소비가 부진하자 한국인은 맵고 짠걸 좋아한다 고춧가루좀 더 넣어라 권하셨고  정말 그렇게 했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흔히 한국 특유 매운라면의 시초를 박정희라고 라면업계나 언론에서도 평가합니다.

 
참고로 대관령 삼양목장도 산지 개발과 목축업 성장을 위해 원조갓카의 지시였죠.

 
아무튼 이렇게 본격적으로 라면시장이 태동하여 급격히 성장하는 걸 눈여겨 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농심의 창업주 신춘호 회장입니다. 

그래서 형인 신격호 회장을 설득했죠.


지금이 라면사업 진출할 기회다!우리가 크려면 지금 뛰어들어야한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은 사업성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고 형제는 갈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형과 충돌끝에 독립적으로 라면사업에 진출하고 회사를 차리는데 바로 1965년 설립된 롯데공업입니다.
하지만 형인 신격호 회장이 아니 나 싫다고 독립해 나갔으면서 왜 롯데란 이름을 쓰냐 가만 안둔다 버럭하자 1978년 지금의 농심으로 사명이 바뀌게 됩니다.

 
사실상 형제관계는 의절한 상태였으며 신춘호 회장은 제사도 불참할 정도였죠.

이렇게 갈라진 형제관계는 55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격호 회장 별세 후에도 신춘호 회장은 끝내 불참하기로 결정했죠.

  
대신 아들인 신동원 농심 부회장과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을 보내 빈소를 지키게하는데 이러다보니 새삼 롯데가 형제관계가 부각되었습니다.  

근데 아이러니한 점은 농심이 창사초기 내세웠던 마케팅 전략이 바로 형제간 우애라는 점입니다.


농심라면 포장지 자체도 그렇거니와 1975년 선보인 TV 광고도 그랬는데 당시 형님 먼저 아우 먼저란 
유행어까지 나오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요즘까지도 이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분분합니다.


형제간 관계 복원을 꾀한것이다부터 고의적으로 디스용이다 한방 먹인거다 걍 그딴거없이 그냥 단순 마케팅이다 등등  

하지만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라면시장은 삼양의 우위였고 농심은 그러한 한국 라면시장의 판을 흔들고 삼양을 꺾을 카드를 모색하는데 그렇게 생각해낸 게 바로 짜장면입니다.

 
당시만 해도 짜장면은 대표적인 고급외식 메뉴 중 하나로 생일이나 입학식, 졸업식, 군 입대직전 상견례 등등에서 주로 먹던 음식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 세대들에게 짜장면은 선망과 동경의 음식이였죠.


그렇게 1970년 롯데짜장면을 출시합니다. 
한국 최초 인스턴트 짜장면입니다.


이를 개발하기위해 연구원들이 전국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문난 중국집을 찾아다니면서 벤치마킹했으며 신춘호 회장을 비롯 당시 임직원들이 토나올 정도로 (?)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롯데짜장면은 런칭하자마 히트를 칩니다.


공장을 최대치로 가동해 하루 최고 9000여 박스를 생산할 정도로 주문이 쏟아졌죠.


1972년 대대적으로 TV와 신문광고를 했으며 무료 시식회를 진행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양을 이기진 못합니다.


이어 1978년 삼선짜장면을 1983년 농심짜장면을 연달아 출시합니다. 
하지만 반응이 썩 좋지못했습니다.


이에 신춘호 회장과 임직원, 연구진들은 새로운 짜장라면 개발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1984년 3월 출시된게 짜파게티입니다.

 
짜파게티 스프의 경우 우연히 연구원이 커피를 타 마시다 커피 알갱이처럼 만든 스프를 생각해서  
개발한 걸로 알려져있는데 최초로 라면 스프제조에 그래뉼 공법을 도입한 걸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모래처럼 고운 가루 타입의 과립 스프는 물에 잘 풀어져 짜장라면에 제격이였습니다. 

많이들 알겠지만 짜파게티라는 제품명은 짜장면 + 스파게티 합성어입니다.
짜파게티의 스프맛은 볶은 간짜장 맛이라는게 농심측의 공식적인 설명이죠.

  
짜파게티에 곁들이는 조미유도 인기에 한몫합니다.


고소함을 위해 냄비를 불에서 내린 직후 기름을 넣고 면에 비비는 방식이였는데 당시 대중들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짜파게티 가격은 기존 짜장라면보다 50원이 비싼 200원임에도 불구하고 들여놓고 진열하기가 무섭게 팔렸죠.려짐  

하지만 짜파게티의 성공에 대해 바로 기존 중국집들의 불만도 대단했습니다.
뭐 그전부터 짜장라면이 나오긴 했지만 짜파게티의 성공으로 기존 짜장면 매출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굳이 왜 중국집까지 가서 비싼 짜장면을 먹어야하나 회의적인 여론이 확산된 것이죠.


그러다보니 농심의 행태에 대해 분노하고 팔지말라는 압력이 들어올 정도였다는데 참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슷합니다 한국인 국민성 ㅋㅋ

 
신제품이나 신기술이 나오면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기존 계층이 생겨나고 그들은 기득권 지키려고 발악하지만  
결국은 시대흐름대로 세상을 돌아가게 되어 있죠.

짜파게티의 성공으로 인해 기존 중국집들은 배달시스템을 강화하고 다른 중식메뉴를 활성화시키는 등  
또다른 생존방식을 모색하게 됩니다.

 
더이상 짜장면 자체로 승부보기 힘드니까요.

짜파게티의 경우 강부자 마케팅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농심의 경우 전속모델이 배우 강부자 선생이였는데  후덕한 서민아줌마 스타일이란 점으로 인해 1981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13년간 농심 라면 전속모델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아직까지 농심라면만 드신다합니다.  
타사 라면은 입에 안맞는다 하셨을 정도죠.

후에 강부자 선생은 농심모델 덕을 톡톡히 보는데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정치할 당시 통일 국민당에 합류하여  비례대표로 국회의원까지 지냅니다.

 
13년 라면모델로 쌓인 친근한 서민적 이미지가 통일 국민당 득표에 도움이 됐거든요.
사실 그래서 농심광고모델을 부득이하게 94년에 마친것이죠.


아무래도 국회의원이 모델로 활동하기는 정치적 부담이 클테니까 말이죠.  

짜파게티가 신드롬을 일으키자 당연히 경쟁사들은 발끈했고 특히나 당시 농심과 라이벌이였던 삼양도 1985년 짜짜로니를 런칭하면서  짜장라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삼양 짜짜로니의 경우 짜장면+마카로니의 합성어로서 출시 당시 짜파게티 카피캣이란 지적이 많았습니다.

농심 짜파게티가 강부자를 내세워 가족적인 이미지로 광고를 제작했다면 삼양 짜짜로니의 경우 이경규를 내세워  
코믹한 이미지로 차별화 시켰습니다.


아무래도 타깃층이 농심은 가족고객을 삼양은 젊은층 고객을 하다보니 그러한 전략으로 나간건데 TV광고도 짜파게티는 가족코드로 짜짜로니는 개그코드로 나갑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결과는 농심 짜파게티의 압승으로 끝나죠.  

농심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인지도있는 아역배우들을 기용 요리사 컨셉으로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날~" 

 

"짜라짜라 짜짜짜 짜~파게티~”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지금도 회자되는 광고카피들을 앞세워 광고를 제작하는데 즉 10대 급식들도 충분히 해먹을 수 있다 그만큼 쉽고 간편하다 이 점을 어필했습니다.


이렇듯 짜파게티 신드롬으로 재미본 농심은 


1988년 짜장범적 (현 짜파게티 범벅)  
1992년 짜장 큰사발 (현 짜파게티 큰사발)  
2004년 사천 짜파게티 (현 사천요리짜파게티)  
2012년 사천오피짜파게티 큰사발 등등 


연이어 다양한 버전의 컵라면을 출시하여 컵라면 시장까지 선점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짜파게티의 성과를 주도한 인물이 신춘호 회장입니다.

  
신춘호 회장에게 짜파게티는 각별한 존재입니다. 
짜파게티란 제품명부터 스파게티처럼 짜장 소스를 면에 비벼먹는다는 점에서 착안해 지어졌으며 짜파게티의 강부자 마케팅이나 광고카피 상당부분이 신춘호표 작품이거든요.


그리고 너구리 (1982년) 안성 탕면 (1983년)에 이어 출시된 짜파게티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86년 신라면이란 홈런이 터졌구요. 


그 결과 1980년대 들어 농심이 라면시장을 제패하는데 짜파게티 또한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970년부터 판 뒤집기에 올인해 짜장라면이란 승부수를 던졌던 신춘호 회장 입장에선 14년만에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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